김영하 작가 ‘윤석은 유괴범에 대해 생각한다. 아무런 처벌도 받지 않고 스스로 생을 마감한 여자. 남의 아이를 유괴해 방과 침대와 책상을 마련해준 여자. 우울증은 유괴의 원인이었을까. 결과였을까.’ 우리 주변엔 유괴 소식이 끊이질 않는다. 인터넷에서도 전봇대에 걸린 전단지에서도 심지어 우편물 뒤까지. 보이지 않는 곳이 없다. 그런 유괴를 작가는 이 소설로 심각하게 풀어가면서 오히려 생명력을 보여준다. 이 소설은 십 년 전에 잃어버린 아들 성민을 찾아 움직이는 아버지 윤석과 미쳐버린 어머니 미라(처음엔 미라가 비유적 표현인 줄 알았다가 나중에서야 이름인 걸 알았다)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과연 카트에서 손을 놓아 아이를 유괴되게 만든 둘 중 누구에게 잘못이 있는지 따지는 듯하면서도, 그 둘과 아이를 키운 ..
김태용 작가 ‘나는 이토록 건조한 세계에 최후로 저항하기 위해 있는 힘껏 담벼락에 등을 부딪치고부딪치고부딪쳤다.’ 배경 그대로 건조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 소설이었다. 배경 뿐 아니라 주인공조차 건조하여 어찌 보면 딱딱하게 주제가 느껴질 수도 있는 내용이었다. 그럼에도 생동감 있게 다가왔는데, 아마 ‘내’가 갈망한 세계가 촉촉해서 그런 게 아닐까 싶었다. ‘나’에겐 경쟁 상대자 동경의 대상인 아버지가 있었고, 그 아버지로부터 동경의 산물인 불륜, 또는 패륜을 이끌어냈다. 어린 시절, 달과 수음을 하던 일을 들켰을 땐 굴욕을 느꼈고, 아버지가 어머니를 버리고 새 여인에게로 다가가길 바랐지만 어머니를 버리지 않았을 땐 원망하기도 했다. ‘나’의 인격 형성엔 이 아버지가 중요하게 닿았던 것이다. 때문에 어른이..
최은미 작가 ‘한여름밤이었다. 주저앉은 남자는 골짜기에 엎드려 밤새도록 흐느껴 울었다. 자식을 안아볼 수 없는 남자. 그의 이름은 강상기였다.’ 한여름, 자미화나무, 아이에게 젖 먹이는 여인, 비와 송진과 곰팡이, 제이골과 허주임. 이 소설에서 반복되어 등장하는 이 단어들은 주인공의 심리를 드러내는데 매우 효과적으로 쓰였다. 한여름이 지속되는 100일 동안 붉게 피는 자미화처럼 자신을 낳고 100일 뒤 떠나버린 어머니에게 한이 맺혀 다른 여자들에겐 정절을 요구하는 주인공 강상기. 비 때문에 자꾸만 생기는 송진과 곰팡이는 아버지 외에 어머니에게 들러붙고 있을 다른 남자를 상징했고, 이를 허주임의 남편과 자식으로 연결시켰다. 한 편으론 자미화나무는 그가 충족하지 못한 어머니, 여성을 상징한다. 그 나무가 배..
정소현 작가 “실수예요, 아버지. 잘 아시잖아요.” 실수하는 인간이 증거를 흘리지 않을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주인공인 석원은 자신을 항상 실수투성이라고 말하지만, 소설 내에선 그가 실수하는 장면은 나오지 않는다. 아마 ‘실패’를 실수로 읽었던 게 아닐까. 그렇다면 전형적인 학대하는 아버지와 새엄마 밑에서 자란 자식은 이미 태어날 때부터 실패작이었단 말이 된다. 작가는 그런 ‘원인’보단 결과물인 석원을 강조하고 싶어서 실패를 실수로 부른 거라고 봤다. 앞부분에서 나온 화분의 실수도 그가 벌인 살인의, 인생의 실패로의 암시였고, 애먼 죄를 뒤집어썼다는 자신의 망상도 새어머니를 죽였다는 자신에게서의 실패를 찾아낸 거다. 그렇게 실수라 옹호하면서 저절로 석원은 자신보다 그를 이렇게 망가뜨린 아버지에게서 실..
백민석 작가 ‘그저 해가 보이지 않을 뿐이다.’ ‘수림’이란 말은 이 소설에서 두 가지 해석으로 나뉜다. 맨 처음 나온 여자의 물로 이뤄진 숲과 어두침침하고 우울하게 내리는 긴 장맛비라는 뜻이다. 물론 두 가지 의미 모두 수림을 이루고 있다. 소설의 주인공인 남자는 아내와 이혼하여 홀로 살아가며 봉사활동을 하고 있다. 그곳에서 만난 우울증 환자인 연주라는 여자와 문자를 나누며(연주 쪽에서의 일방적인) 관계를 연명하고 있었다. 하지만 남자는 언제나 물의 터널 한가운데에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중간마다 이 묘사가 자주 등장하는데, 이것이 수림의 두 가지 의미와 어우러져 강한 인상을 남겼다. 시도 때도 없이 작중 내내 내리는 비와 해가 보이지 않는 답답함 속에서 살아가는 주인공. 그래서 모든 일에 신경을 두지..
김훈 작가 가난하다, 라는 느낌이 실감나게 와 닿는 소설이었다. 이를 크게 느꼈던 부분들을 고르자면, 영자의 ‘왜 이건 되고 이건 안 되는 거지? 왜 그런 거야? 왜 이건 안 되냐구.’ 와 공무수행 트럭이 떠날 때마다 들리는 ‘살려줘, 살려줘’ 소리다. 전자는 검사, 판사, 도지사의 한자인 일사(事)와 변호사, 계리사, 변리사의 선비사(士)의 차이점을 따지는 시험에서 영자의 불평이다. 단순히 시험문제에 관한 부분으로 넘어갈 수도 있었지만, 그렇게 넘겨짚기엔 조금 대화가 상황에 맞물려 슬프게 들렸다. 사회에선 충분히 가능하거나 허락될만한 일들이 별 문제 없는 차이 때문에 다르거나 틀리다는 식으로 평가받는다. 이것을 주인공과 영자가 놓인 현실이라고 생각했다. 아버지의 어선까지 팔아서 공부를 하는 주인공과 순..
김언수 작가 아버지들은 언제나 자유를 꿈꾸고, 그것을 실행하는 이는 적다. 이 소설의 아버지는 실행한 쪽으로 볼 수 있지만 실패자라는 딱지가 붙은 사람이다. 그러한 실패 끝에 얻은 간암 말기까지, 그 행적을 어떻게 비춰보든 간에 이 아버지는 모든 사람들에게 그저 ‘패배자’였다. 아내에겐 물론이거니와 자신의 어머니에게도 못 마땅한 취급을 받는 아버지의 모습들은 IMF 때부터 줄곧 우리의 곁에서 작용하고 있었다. 지금은 그때보다 형편이 많이 좋아졌다 하여도 빈부격차가 점점 날수록 아버지의 입지도 줄어들고, 이 소설처럼 경멸 받는다. 그렇다고 해서 이 소설이 그런 아버지들을 비판한다는 말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로 ‘추억’을 하고자 쓰였다고 생각했다. 날마다 일 때문에 얼굴을 비추지 않는 아버지들을 원망하는..
김솔 작가 ‘독자들이 다 사라지고 작가들만 남으면, 우린 누구한테 책을 팔지?’ ‘그땐 책 대신 독자들을 팔면 되지.’ 이 문장이 가장 인상적이었다. 이를 보충하는 문장들도 몇몇 있었는데, 작가가 장치 조절을 잘했다고 생각했다. 이 소설은 독자와 거짓(짝퉁)이라는 키워드를 가지고 이야기를 이끌어간다. 그것을 작가는 독자를 거짓된 이야기를 포장하여 속여야한다, 라는 뜻과 작가이자 훌륭한 독자가 될 자의 계몽의식을 일깨우려는 내용이라고 판단했다. 하지만 전태일 분신사건에 관해 조사하고 나서 생각이 조금 달라졌다. 앞부분에서 언급한 전태일과 미싱공장, 명품 짝퉁을 파는 노인에 관한 이야기를 다루는 부분과 작가 지망생들을 이용하는 작가들의 이야기가 서로 엮어진다. 그것이 이 소설의 특징이며, 대비되는 효과를 띄..
에선 ‘죽음’이 주된 주제로 나타나고 있다. 우리의 삶에 죽음이란 아주 가까운 존재이며, 또한 굉장히 멀리 있는 것이라 여겨지고 있다. 이를 일깨워주고자 는 ‘김’이란 인물을 통해, 일어나는 사건에서 느끼는 감정으로 독자에게 주제를 전달한다. 여러 인물들의 죽음과 그의 일상을 위협하는 죽음의 실체들이 결말에 이르러 ‘구애’로 이어지는 자극으로 변화되는 것으로 끝나게 되는데, 이 점이 참 의미심장하다고 느꼈다. 이 소설은 주인공 ‘김’의 마음을 대변하는 관찰자적 시점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렇지만 대사가 그리 자주 사용되진 않았다. 확실하게 대사로 처리된 부분은 고속도로를 달리다가 화환을 주문한 친구에게 전화가 걸려오는 장면밖에 없다. 그것도 ‘아직 죽지 않았다고?’라는 그의 말에서 볼 수 있듯, 소설에서 ..
8월의 크리스마스 (1998) 이 영화를 보기 전에 지문으로 처음 접했던 기억이 난다. 모의고사였던가, 국어 지문으로 출제된 적이 있었는데, 아직도 기억에 남아 있었다. 제목은 생각이 나지 않았지만 영화 속에서 보인 카메라를 통한 시선이나, 대사 없이 지문으로 이루어진 씬들이 강렬하게 떠올랐다. 내 또래들은 이상하게도 아이스크림을 먹는 지문을 많이 기억하고 있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영화에 죽기 전에 꼭 봐야할 영화 100, 대한민국 최고의 멜로영화 등 최고의 평가를 내린다. 아마도 얼마 살 수 있는 날이 남아있지 않은 사람과의 로맨스를 그려서 감동적으로 느끼는 부분도 있겠지만, 대체적으론 사랑의 정의를 다시 한 번 되돌아 보는 기회를 만들어주기에 좋게 평가하는 구석이 없지 않아 있을 것이다. 그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