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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래곤 로드가 이 말을 알까?

「나는 단수가 아니다」

드래곤 로드의 눈썹이 꿈틀거렸고 나는 질겁했다. 그렇군. 그는 알고 있었군. 드래곤 로드는 차갑게 말했다.

「그 간악한 녀석의 말이로군」

드래곤 로드의 목소리의 울림은 스산했다. 난 간신히 입을 열었다.

「예. 그리고 그것이 인간이에요. 당신이 아까부터 우리 일행에게 던져온 질문, 아마 당신은 우리를 아직 이해하지 못하셔서 그렇겠지요. 무례하다고 꾸짖지 않으시겠다면 설명드리겠습니다. 나는 하나가 아니에요. 따라서 당신은 아까부터 얼빠진, 죄송하지만 이렇게밖에 표현이 안 돼요. 예. 얼빠진 질문을 하고 있었던 셈이지요」

가슴이 쾅쾅커리는걸? 다행히도 드래곤 로드는 초장이의 맛이 어떨지 심사 숙고하는 표정은 아니었다. 그는 차분히 말했다.

「나의 실수를 설명해 주겠나?」

「당신은 나눌 수 없는 것을 나눠놓고는 선택하라고 질문하셨어요」

「나눌 수 없는 것?」

제레인트는 호기심이 가득한 얼굴로 날 바라보고 있었고 네리아는 두 손을 꽉 쥔 채 날 바라보고 있었다. 샌슨은 파랗게 질려 있었고 이루릴은 무표정했다. 하지만 칼은 희미하게 웃고 있었다.

「그래요. 당신은 나눌 수 없는 것을 나누어서 질문하셨어요. 당신 보시기에는 나눌 수 있는 것처럼 보일지 몰라도 우리 입장에서는 그렇지 않아요. 드래곤 로드께서는 샌슨에게 이렇게 질문하셨지요」

샌슨은 덜커덩 하는 소리만 내지 않았을 뿐 그 외에는 심장이 내려앉은 사람의 모든 징후를 보여주고 있었다. 나는 그에게 미소를 지어주고는 계속 말했다. 손바닥에 땀이 나는걸? 난 슬쩍 그것을 바지에 닦아버리고 싶었지만 꾹 참으면서 말했다.

「샌슨의 가족들을 죽이겠는가, 샌슨을 죽이겠는가. 조금 달랐을지 몰라도 대충 그런 의미였지요. 하지만 그건 나눌 수 없어요」

「어째서지?」

「샌슨은 하나가 아니니까. 샌슨은 헬턴트의 경비 대장 샌슨이고, 나의 좋은 동료 샌슨이고, 샌슨의 아버지 조이스 씨의 사랑하는 장남이에요. 칼의 신뢰받는 길잡이고, 그리고 그 아가씨에게는 사랑하는 연인인 샌슨이에요. 그리고 그 모든 것이 샌슨이지요. 이런 식의 이야기도 들어보셨겠지요? 어쨌든 당신은 샌슨 하나를 살려주는 대신 그 가족들을 죽이겠다고 말했지만, 그 가족들을 죽이면 샌슨도 죽는 셈이에요」

난 주먹을 꽉 진 채 말했다. 이마에 열기가 올라 쓰러질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도저히 말을 멈출 수가 없었다.

「그래요. 그 모든 것이 샌슨이에요. 당신이 헬턴트 영지를 파괴하면 헬턴트 경비 대장 샌슨을 죽이는 셈이에요. 당신이 날 죽인다면 후치의 동료 샌슨을 죽이는 셈이구요. 당신이 조이스 씨를 죽인다면 조이스 씨의 아들인 샌슨은 죽는 셈이에요. 당신이 칼을 죽인다면 칼의 길잡이 샌슨이 죽지요, 그리고, 그리고 그 아가씨를 죽인다면 그 아가씨의 연인인 샌슨을 죽이는 셈이라구요」

「샌슨은 하나가 아닌가?」

「하나가 아니에요!」

 

<드래곤 라자 7권 中>

 

이영도 작가의 판타지 세계관은 많은 독자들에게 사랑 받고 있다. 그 중 드래곤 라자는 퇴마록과 함께 한국 판타지의 길을 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이텔에서 연재되어 상업적 성공에 이른 이 작품은 한국 판타지 팬덤(Fandom)형성의 기폭제가 되었다. 지금까지도 다른 판타지 작가들의 목표가 되고 있다. 이 소설이 양판소 시장에 큰 영향을 끼친데 한 몫 했지만, 판타지 소설의 장르 문학 시장도 형성한 것이다.

이렇게 이 소설이 큰 영향력을 행사하게 된 이유 중 하나로 드래곤 라자만의 철학적 사색을 뽑을 수 있다. 위의 본문 예시처럼, 일반 판타지 문학의 특성에 작가만의 생각을 가미하여 외국에서 들어온 ‘판타지’란 장르 문학을 새롭게 탈바꿈한 것이다.

전후 줄거리를 간략하게 요약하자면 주인공의 마을에 들이닥친 드래곤을 회유하기 위해 보석을 구하러 나선 일행의 대륙 탐방기로, 윗글은 드래곤 로드가 사는 미궁에 들어가 보석들을 건네받기 전에 나눈 질의문답이다. 드래곤의 수장인 드래곤 로드는 인간에게 흥미가 있어서 일행에게 이것저것 물어보는데, 여기서 이영도만의 철학적 내용이 드러난다. 드래곤 로드의 질문은 ‘나눌 수 없는 것’에 중점을 두고 있다. 주인공을 포함한 모든 일행에게 ‘네가 희생됨으로 소중한 이들을 구할 수 있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물음을 제시한다. 하지만 출제자 드래곤 로드의 의도와는 다르게, 일행 모두 자신을 희생하겠다고 말한다. 심지어 주인공 후치는 자신의 일행일 뿐인, 대륙의 희망으로 거듭날 소녀를 위해 목숨을 내놓겠다고 말했다. 일행은 드래곤 로드와 마주하면서 두려움을 느꼈지만, 그 위협적인 존재 앞에서 꿋꿋하게 자신의 소신을 밝혔다. 이에 드래곤 로드는 이유를 묻는데, 후치의 입으로 작가의 말이 등장한다. 자신이 단수가 아니기 때문이라고.

‘나는 단수가 아니다’는 드래곤 라자의 핵심 주제를 꿰뚫고 있다. 이 말을 해석하자면, 사람은 영생을 살 순 없으나 단수가 아니기 때문에 다른 존재들을 넘어설 수 있다는 것이다. 사람은 혼자가 아니다. 자신이 살아오면서 마주한 모든 이들의 기억 속에서 재생되어, 잊히지 않는 한 영원을 살아갈 수 있다.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는 말과 비슷한 맥락이나 조금만 더 자세히 살펴본다면 완전히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단수가 아니란 말은 즉, 사람은 복수의 형태로 존재한다는 것인데, 이를 작가는 주인공의 입을 빌려 ‘사람은 기억으로 존재하기 때문’이라는 대답을 내놓았다. 자신과 관련된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사라지지 않는 한 자신은 무한히 존재할 수 있고, 또한 앞으로 나아갈 수 있게 된다는 뜻으로 해석이 가능하다.

이 주인공의 한 마디가 많은 독자들, 나아가 이 소설을 읽게 될 모든 사람들의 가슴에 닿게 될 것이다. 나는 그때 비로소 드래곤 라자와 마주한 타인들의 마음과 이어지게 될 것이다. 내가 단수가 아닌 것처럼, 이 소설을 읽으면서 많은 이들과 공명할 것이다. 책으로 서로 하나가 될 수 있다고 느꼈다. 드래곤 라자를 읽으면서, 내가 책으로 생각을 전해서 또 다른 이들의 기억 속에 남게 된다면, 그러므로 내가 필연적으로 이해할 수 없었던 사람들과 마음을 나눌 수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이야기란 참 신기하고 오묘한 것이다. 구전으로, 종이로, 모니터로 서로가 이어질 수 있다. 이야기가 모여 소설이 되고, 그 소설을 읽으며 ‘기억’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 많은 뜻을 품고 있는 구절이 마음에 들었다. 그리고 그것이 앞으로 나의 모토가 될 것이다.

내가 쓴 글이 많은 사람들의 뇌리에 남는다면, 더 나아가 그 사람들을 변화시킬 수 있는 게 이야기의 궁극적인 목표가 아닐까 생각해보았다. 내가 표현할 수 있는 모든 창작 활동은 그러기 위해 존재한다고 볼 수도 있을 거다. 그렇다면 과연 여기서 내가 나아가야할 방향은 어딘지, 또 그렇게 나아가기 위해 어떤 마음가짐을 가져야할지 궁리하겠다고 다짐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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